2022년 마지막 날을 하루 앞두고 제주에서 이문세 콘서트가 있었다. 이문세를 좋아하고, 이문세 노래도 좋아하고, 공연도 좋아하는 시각장애인이 있어 그가 좋아하는 공연을 같이 가기로 했다.
서로 다른 지역에 살다 보니 나는 서울에서 제주까지 공연을 보러 갔다. 나는 저시력인이고, 그는 전맹이라 내가 안내하고 공연 내용을 설명해 주어야 했다. 입장을 하면서 나는 제주도의 여러 알고 지내는 장애인들과 만날 수 있었다. 장애인들도 공연문화를 즐기는 데 참여도가 높고 편의시설이 잘 되어 있구나 싶었다. 나는 이 공연은 두 번 보는 것이었다.
비장애인에게 공연은 온라인에서 티켓을 구매하면 티켓을 현장에서 받을 것인지, 우편료를 물고 집으로 배송을 받을 것인지 선택권이 있다. 그런데 장애인은 장애인 할인을 할 경우 현장 수령만 가능하다. 장애인복지카드를 보고 확인을 하겠다는 것이다.
장애인 할인에 대한 표시를 하면 별도의 인쇄를 해야 하니 비용이 더 들 것이고, 입장하는 과정에서 장애인복지카드를 검사하면 번거롭기도 하고 줄을 길게 서 있는 바쁜 상황에서 번거롭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티켓판매는 보통 티켓판매 온라인 전문회사들이 거의 독점을 하고 있어 항공사나 철도공사처럼 티켓을 예약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장애인이라고 하여 온라인으로 주문을 하고도 현장에서만 티켓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차별받는 것 같다. 하지만 이는 공연기획사의 문제가 아니라 티켓판매 대행사의 문제이다.
이문세 공연은 시각장애인이 즐기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세 번에 걸쳐 자막이 나오는데, 단순히 노래 가사를 자막으로 보여주는 것이라면 평소 노래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별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양평에서 개를 기르며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보여준다. 상당히 긴 시간이고 개와의 놀이에서 웃기는 장면도 있는데, 시각장애인은 전혀 그것에 참여할 수가 없고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어리둥절해진다.
다음으로는 공연에 선곡되지 못하였지만 관객 두 사람과의 인터뷰를 통해 선곡할 후보곡들을 자막으로 보여준다.
세 번째는 공연 마지막 부분에 관객들에게 묻는다. ‘예/아니오’라고 답하게 하는 질문들로 구성되어 있다. “당신은 꿈을 이루었습니까?” “저는 가수가 꿈이였습니다.” “당신은 지금 행복하십니까?” 등 예스나 노를 답하게 하는 여러 질문을 한 다음 가수가 아닌 방송 프로그램 진행자로서 일했던 사정을 소개하면서 자신은 진정 가수가 본 직업이며 행복함을 느끼는 일임을 설명한다. 이 장면에서도 시각장애인은 아무것도 알 수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진다.
나는 공연 시작 바로 전에 안내방송을 통해 카메라 촬영이나 녹음을 금지한다는 지침을 들은 것을 잘 이해하고 있다. 이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첫째는 다른 관객들에게 방해를 주지 말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저작권이 있다는 것이다.
공연 전 안내방송에서는 절대 일어서지 말라는 방송도 했다. 공연장의 구조상 일어나서 뛰거나 떼창을 하기에는 위험하다는 것이다. 이는 안전을 지키려는 의도와 그런 행동에 대한 인식을 시켰으니 사고나면 피해자의 책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하지만 공연 시작 부분에서 이문세는 발라드만 부르겠다고 말하고는 서서히 신나는 곳으로 흥을 북돋운다. 이는 전국 투어 어느 곳의 공연이나 동일 했다. 마치 오늘 집에 가지 말까요? 하는 가수의 빈말과 같다. 그리고는 일어나서 호응하기를 주문한다. 흥은 북돋우면서 사고의 책임은 가수가 지는 것이 아니라 공연장이나 기획사가 지는 것이니 일어나지 말라는 것을 지킬 이유가 없다.
내가 이 글을 쓴 이유는 지금부터다. 나는 저시력이니 자막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다른 곳에서 공연을 미리 보았지만 자막은 동행한 주위 지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설명을 들을 수 없었다. 거리가 멀고 글씨가 작아 다른 사람들도 자막이 잘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번에는 내가 궁금증을 직접 풀고 전맹 동행인에게 설명을 해 주고자 나는 핸드폰의 카메라 확대기능을 이용하여 자막을 읽고 낮은 목소리로 설명해 주었다. 촬영을 한 것도 아니고, 녹음을 한 것도 아니니 지침을 어긴 것도 아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흔들거나 환호하면서 박수를 친 후 자막이 나오는 장면에서는 모두 자리에 앉아 마음을 조금 진정시키는 타임이니 공연 노래에 방해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안전과 진행을 맡은 기획사 직원이 다가와서 자제를 해 달라고 말하고 갔다고 한다. 하지만 전맹인 시각장애인은 그 말을 오해했다. 단순히 자제하라고만 하니 무엇을 자제하라는 것인지 몰랐다. 자신이 기침을 하였는데, 그것을 코로나를 의식하여 자제하라는 말로 이해했다고 나중에야 말했다. 물론 그 말은 나에게 당시에는 전달될 리 없었다.
내가 자막의 글씨를 읽기 위해 눈에 힘을 주어가며 폰의 확대기능을 이용해서 귓속말로 설명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 와서 내 어깨를 쳤다. 공연 앵콜 직전에 마지막 자막을 읽는 중에 우리 좌석 바로 뒤 편집기를 다루는 기사가 다가와서 위압적인 어조로 당장 폰을 끄라고 했다.
내가 자막설명을 하기 위해 다른 관객의 방해를 하지 않을 의도로 뒷좌석을 예매했기에 바로 뒤에 엔지니어가 있었다. 나는 촬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각장애인을 위해 자막을 읽기 위해 폰을 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자 그는 화를 내면서 “끄라면 끄시오!”라고 당장 내 폰을 압수하거나 공격을 해 올 태세였다. 전맹인 시각장애인은 이런 분위기를 알아차리고 화면 설명을 더 이상 하지 말아 달라고 했고, 나는 폰을 껐다.
더 이상 공연은 즐겁지 않았다. 기분이 매우 나빠졌으니 흥겨울 리 없었다. 생각해 보니 화를 낼 사람은 그가 아니라 나인 것 같았다. 시각장애인을 위해 자막만 보여줄 것이 아니라 자막과 함께 성우를 이용하거나 이문세 자신의 목소리로 읽어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낭독을 통해 멋있게 호응을 더욱 적극적으로 유도할 수도 있다. 누군가는 전혀 그 자막 때문에 ‘동등한 문화참여권’이 침해되고 있다는 것을 몰랐을까?
미처 몰랐다고 하자. 설명을 하는 나의 말을 들은 기사는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보다 부드러운 협조를 구하거나, 죄송하다고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자제에 대해 다른 변명을 한다고 여기고 강압적으로 말한 그가 잘못일까? 시각장애인을 위해 자막을 읽어준 내가 잘못일까? 직원이 오해를 할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한다면 내 설명 후 태도는 달라질 수 있지 않았을까? 이는 시각장애인이 소수이기 때문에 무시된 것은 아닐까? 관객에게 호응을 요구하고, 분위기를 조성해 행복을 주고자 하는 것이 공연이라면 그 공연에 참여한 모든 사람에게 그 행복을 경감시키지 않으려는 배려는 필요했다.
이문세가 현란한 말솜씨와 화려한 조명과 떨리는 호소력을 가진 목소리로 모두가 즐거울 때에 누군가는 억울하게도 공연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하고 있어야 했던 것이 개인의 탓이 아니라, 무시당한 권리였다는 것을 이문세도 알아야 하지 않았을까? 기획자가 아니라 공연은 주인공이 진행하는 것이니 말이다.
그날 기분을 잡쳐서 다시는 이문세 공연을 가지 않기로 했다. 인터뷰는 마지막 잔여표를 구한 관객은 인터뷰 후 30년이 지나 다시 공연을 보러 올지 몰라도 나는 가지 않을 것이다.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
-에이블뉴스 기사 제보 및 보도자료 발송 ablenews@ablenews.co.kr-